영화 <패왕별희>는 단순한 시대극도, 단순한 예술 영화도 아니다. 이 작품은 경극이라는 중국의 전통 예술을 중심축으로 하여, 20세기 중국의 정치·사회적 격동 속에서 살아가는 두 인물의 삶을 치밀하게 조망한다. 배경은 1924년부터 1977년까지의 현대 중국이며, 그 거대한 시대 흐름 속에서 덩썬과 스투라는 두 경극 배우의 관계와 삶이 교차한다. 덩썬은 경극 무대에서 여장을 맡는 ‘페이왕’ 역할로 명성을 얻는 인물이며, 스투는 그의 오랜 동료이자 복잡한 감정선 위에 서 있는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히 직업적 동반자이거나 우정을 넘은, 정체성과 존재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특히 덩썬(장국영)의 삶은 예술과 현실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흔들린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경극 무대로 인생이 설정된 인물로, '페이왕'이라는 역할이 단순한 배역이 아니라 곧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가 되어버린 존재다. 이 정체성과 실제 사회적 위치 사이의 간극에서 오는 혼란, 그리고 억압은 그의 삶 전체를 지배한다. 반면, 스투(장풍의)는 덩썬의 불안정한 내면을 묵묵히 지지하며 옆에서 함께 걸어가는 인물이다. 여기에 공리의 ‘주샨’은 스투의 아내로 등장하며, 이 복잡한 삼각 구도에 강렬한 긴장감을 더한다. 주샨은 단순한 갈등 유발자가 아닌, 사랑과 현실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또 다른 희생자다. 세 인물의 관계는 사랑, 예술, 정치적 현실이라는 다층적 구조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충돌한다.
1. 주제
영화의 주제는 단순한 동성애적 사랑이나 예술적 고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정체성’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사회적 억압과 예술이 만나는 지점을 섬세하게 탐색한다. 덩썬은 자신이 맡은 배역 ‘페이왕’에 몰입하면서 점점 남성과 여성, 무대와 현실, 연기와 실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간다. 그는 단순히 배역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배역 안에 스스로를 묻는다. 덩썬의 삶은 곧 그가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인물과 겹쳐지며, 경극이라는 전통 예술이 한 인간의 내면을 어떻게 지배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몰입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스스로를 억압하게 만든다. 시대는 그에게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고, 그는 결국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스스로를 옭아매며 무너져간다. 그에게 있어 예술은 자아를 표현하는 통로이자, 동시에 가장 거대한 족쇄였던 것이다. 반면, 스투는 현실에 발을 디디며 덩썬을 지지하지만, 그 역시 시대의 변화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 이 둘의 관계는 예술과 현실, 사랑과 동료애, 그리고 시대적 억압 속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 연기와 연출
이 영화가 오래도록 기억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배우들의 압도적인 연기력이다. 장국영은 덩썬이라는 복잡한 캐릭터를 내면의 고통과 혼란, 그리고 애증까지 모두 담아내며 스크린 위에 풀어낸다. 특히 경극 무대 위에서 그의 눈빛과 몸짓 하나하나는 마치 실제 경극 배우처럼 느껴질 만큼 사실적이고 몰입감 있게 그려진다. 장국영은 이 역할을 통해 인간 내면의 고통을 예술이라는 장치로 승화시켰고, 그 고통이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장풍의의 스투는 덩썬의 연기에 안정감을 더하는 인물로, 무대 뒤에서 한결같은 믿음과 충성심을 보여준다. 스투는 늘 덩썬을 지지하지만, 그 지지가 언제나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그의 내면에도 갈등이 존재하며, 이는 장풍의의 절제된 연기를 통해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공리는 주샨이라는 인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녀는 단순히 남자들 사이의 갈등을 일으키는 인물이 아니라, 사랑과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스스로의 욕망과 체념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을 표현한다.
첸 카이거 감독의 연출은 매우 섬세하고 감각적이다. 그는 거대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인물들의 내면을 깊이 있게 그려내며, 각 장면마다 시각적 상징성과 정서를 담아낸다. 경극 무대의 화려함과 그 속에 감춰진 고통, 그리고 격변하는 중국 사회의 풍경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시대의 변화를 그대로 반영한 세트와 의상은 단지 배경을 꾸미는 데 그치지 않고, 인물들의 감정과 연결된 서사 구조의 일부로 작동한다.
의상과 분장은 단순한 경극 복식의 재현이 아니라, 인물들의 내면과도 연결되어 있다. 특히 덩썬이 무대에서 여장을 하고 등장할 때의 의상과 메이크업은 그가 무대 위에서 찾은 정체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다. 영화의 음악은 전통 경극의 멜로디와 현대적 요소를 조화롭게 결합하여, 감정선을 한층 풍부하게 만든다. 음악은 단지 배경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사의 흐름을 이끄는 하나의 축으로 작동한다. 장면마다 적절히 배치된 음악은 인물의 감정과 영화의 분위기를 극대화시키며, 관객을 그 시대 속으로 끌어들인다.
3. 결론
<패왕별희>는 단순한 개인의 이야기로 보이지만, 그 안에는 격동하는 시대의 초상이 담겨 있다. 영화는 중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일제 침략, 국민당과 공산당의 갈등, 문화대혁명 등—을 배경으로 하여, 그 속에서 살아가는 예술가들이 어떻게 흔들리고 희생되는지를 보여준다. 경극이라는 고전 예술이 시대의 변화 속에서 어떻게 위축되고, 때로는 이용당하며, 끝내 몰락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담아낸다. 그 중심에 덩썬과 스투, 그리고 주샨이 있다. 이들의 인생은 곧 중국 현대사의 축소판이자, 예술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든 이들의 자화상이다.
<패왕별희>는 단순한 영화가 아닌, 시대와 인간, 예술과 정체성에 대한 서사시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깊은 감정적 울림을 주며, 인간의 내면과 사회적 억압, 그리고 예술의 본질에 대해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진다. 특히 장국영의 연기는 영화 속 덩썬이라는 인물을 넘어, 관객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는 감정의 잔상을 남긴다. 그의 고통, 혼란, 사랑,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의 헌신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완성된다.
이 작품은 1993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그 예술성과 메시지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고, 지금까지도 세계적인 걸작으로 회자된다. <패왕별희>는 단순한 동양의 비극적 예술 영화가 아닌, 인간 존재의 본질을 파고드는 깊은 이야기이며, 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한 번쯤은 반드시 마주해야 할 작품이다.